오노레 드 발자크 – 미지의 걸작

손, 아까 예로 들어서말하는 건데, 손은 단지 육체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포착해서 재현해야만 하는 어떤 생각을 표현하고 연장해 내는 것이야. 화가도, 시인도, 조각가도 원인과 결과를 분리시킬 수는 없네. 그 둘은 어쩔 도리가 없을 정도로 서로가 서로에 속해있지! 진짜 투쟁은 바로 거기에 있는 거야! 수많은 화가들이 이러한 예술의 테마를 알지 못한 채 직관적으로만 성공을 거두지. 자네들은 여자를 그리지만 그녀를 보지는 못해! 그렇게 해서는 자연의 비밀을 손에 넣을 수가 없어. 자네들의 손은 스승의 작품에서 베꼈던 모델에 대해 사유하지 않은 채 그것을 재현할 뿐이지. 자네들은 형태의 내면으로 충분히 침참하지 못하고, 우회하기도 하고 달아나기도 하는 그 형태를 충분한 사랑과 인내로 쫓지도 못해. 미란 엄격하고 어려우 것이네. 결코 이런 식으로 도달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지. 그것의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고, 그것을 탐색하고 압축해야 하며, 그것이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긴밀하게 얽어매야 하네. 형태는 신화 속의 프로테우스 보다 훨씬 더 붙잡기 어렵고 풍요롭고 굴곡 많은 프로테우스야. 긴 싸움을 거쳐야만, 미를 그것의 진정한 모습으로 드러낼 수 있지.

-Le Chef d’oeuvre inconnu (미지의 걸작)

우아함과 고귀함의 표본이며 매혹적인 정신의 소유자인 그는 자신의 배를 모든 해안에 정박시켰고, 누군가 자신을 이끌도록 내버려 두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데까지만 갔다. 살면 살수록 그는 의심이 더 많아졌다.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그는 자주 용기가 무모함이 되는 것을 알아챘다. 신중함이 비겁함이 되고, 관대함이 교활함이 되며, 정의가 범죄가 되고, 섬세함이 어리석음이 되고, 성실함이 조직이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기이한 숙명으로 인해, 그는 진실로 올바르고 섬세하고 정의롭고 관대하고 신중하고 용기 있는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존경도 받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L’Elixir de longue vie (영생의 묘약)

장 폴 사르트르 – 구토

만약 내 ‘자신의 삶’이 멜로디의 소재가 되었다면 무슨 절정엔들 도달하지 못하겠는가.

과거, 그것은 소유자의 사치인 것이다. 어디에 나의 과거를 간직해둘 수 있을까? 사람은 자기의 과거를 호주머니에 넣어둘 수 없다. 과거를 정돈해놓기 위한 집을 한 채 가져야만 한다. 나는 나의 육체밖에는 가진 것이 없다. 자신의 육체만 가지고 있는 아주 고독한 사람은 추억을 간직할 수가 없다. 추억은 육체를 거쳐서 지나가버린다. 나는 슬퍼해서는 안 된다. 나는 자유로웠으니 말이다.

“나를 믿으시고. 나는 경험에 입각해서 얘기합니다. 나의 지식은 모두 생활에서 얻은 것이오.” ‘생활’이 그들을 대신해 생각을 해준단 말인가? 그들은 새로운 일을 옛것을 가지고 설명한다 – 그리고 옛것은 더 옛것을 가지고 설명했다. 마치 역사가가 레닌을 러시아의 로베스피에르라고 하고, 로베스피에르를 프랑스의 크롬웰이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결국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나는 존재할 권리가 없었다. 나는 우연히 나타나서 돌처럼, 식물처럼, 세균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나의 생명은 되는 대로 여러 방향으로 싹텄다. 그 생명은 간혹 애매한 신호를 나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또 어떤 때에는 아무 결과도 없는 윙윙 소리밖에 나는 느끼지 않는 것이었다.

드 로르봉 씨는 나의 협조자였다. 그는 존재하기 위하여 나를 필요로 했으며, 나는 나의 존재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그가 필요했다. 나는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엇에 써야 좋을지 몰랐던 원료, 즉 존재, ‘나의’ 존재라는 원료를 공급하고 있었다.

화요일

아무 일도 없다. 존재했다.

존재는 기억이 없는 것, 사라져버린 것 들이며, 존재는 아무것도 – 추억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도처에 무한하게, 여분의 것인, 항상 어디에나 있는 존재, 그 존재는 – 존재에 의해서만 한정된다.

안니는 거의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 얼굴을 바꾸는 것이다. 마치 옛 배우들이 순간 가면을 바꿔버리듯이 말이다. 그 가면의 하나하나가 분위기를 만들고, 다음에 나올 어조를 부여하도록 되어 있다.

시몬 드 보부아르 – 모든 사람은 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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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신에 의해 자기를 해명할 수 없다. 오히려 신이 인간에 의해 해명된다. 신의 부름이 들리는 것은 사람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인간이 거기에 응답하는 것은 철저하게 인간적인 기획에 의해서이다. 그러므로 만일 신이 실존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초월성을 인도하기에는 너무나 무력하다. 인간은 오직 다른 인간들로 이루어진 상황 속에 놓여 있을 뿐이다. 하늘 저 깊은 곳에 신이 있건 말건 인간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

노예가 자신의 존재를 완성하는 길은 그 존재를 장악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사물이 되는 것이다. 많은 남자들, 특히 여자들이 원하는 휴식이 바로 그런 것이다.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는 그런 휴식.

타인이 제시하지 않은 목적을 내가 스스로에게 제시하고, 그 목적이 바로 나의 목적이라면, 나는 결코 헌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행위를 하는 것일 뿐이다.

야마구치 슈 –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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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를 경멸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너무 신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부를 얻을 가망이 없는 사람들이 부를 경멸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부를 얻게 되면 그들만큼 상대하기 곤란한 사람은 없다. – 프렌시스 베이컨 <베이컨 수상록>

악이란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 한나 아렌트

우리는 신념이 행동을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인과관계는 그 반대라는 사실을 인지 부조화 이론은 시사한다. 외부 환경의 영향을 받아 행동이 일어나고, 나중에 그 행동에 합치되도록 의사가 형성된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합리적인 생물이 아니라 나중에 합리화를 도모하는 생물이라는 것이 페스팅어(Leon Festinger)가 내놓은 대답이다.

브리지스의 말에 의하면 경력이나 인생의 전환기는 무언가가 시작되는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일이 끝나는 시기다. 거꾸로 말하면 무언가가 끝남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된다는 것인데, 사람들은 대부분 후자의 ‘새로운 시작’에만 주목해 대체 무엇이 끝났는지, 무엇을 끝내야 하는지 ‘끝’에 관환 물음에 진지하게 맞서지 못한다.

우리는 쉽사리 ‘알았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걸까? 영문학자이자 <지적으로 나이 드는 법>의 저자인 와타나베 쇼이치는 “두근두근할 만큼 알지 못하면 아는 것이 아니라”라고 분명히 말했다. 또한 앞서 소개한 것처럼 역사학자 아베 긴야 교수가 그의 스승인 우에하라 센로쿠 교수에게서 “안다는 것은 그로 인해 자신이 변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는 일화도 있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해서 사고한다.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그 언어 자체가 이미 무언가의 전제에 따라 달라진다면 어떻겠는가? 언어를 이용해 자유롭게 사고해야 하지만, 그 언어가 의지하고 있는 틀에 사고를 의지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게 사고할 수 없고, 그 사고는 우리가 의거하고 있는 무언가의 구조에 의해 불가피하게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사르트르 또한 조직과 사회가 들이대는 척도를 보며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고 완전한 자유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예술 작품처럼 창조해 내야만 자신의 가능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마키아벨리 – 군주론

“Everyone sees what you appear to be, few experience what you really are.”

“The first method for estimating the intelligence of a ruler is to look at the men he has around him.”

“…..사자는 덫(함정, 계략)을 피하지 못해서 빠지기 쉽고, 여우는 늑대(무력, 폭력)를 물리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덫을 알아 차리려면 여우가 될 필요가 있고, 늑대를 혼내주려면 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저 사자의 역할만 하려는 군주는 모든 일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군주는 비난받거나 미움받는 일들은 타인에게 미루고, 자비를 보일 수 있는 일은 자신이 직접 해야 한다.”

헤르만 헤세 – 수레바퀴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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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 healthy person must have a goal in life and that life must have content.”

“Like a wallflower he stayed in the background waiting for someone to fetch him, someone more courageous and stronger than himself to tear him away and force him into happiness.”

엠마의 모습도 달라져 있었다. 한스는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단지 검고 쾌활한 눈과 불그스레한 입술과 그 안으로 뾰족하게 드러난 하이얀 이만 보일 뿐이었다.  그녀의 형체는 녹아 없어지고 말았다. 한스는 그저 하나하나의 부분을 보고 있었다. 검은 양말을 신은 단화며 목덜미에 늘어뜨린 흐트러진 곱슬머리, 푸른 목도리 속에 감추어진 햇빛에 그을린 둥근 목덜미, 팽팽하게 당겨진 어깨의 옷매무새, 그 아래로 파도치는 숨결, 붉은 빛으로 투명하게 내비치는 귀.

밀란 쿤데라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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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사랑)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도 있다. 테레자는 카레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를 자신의 모습에 따라 바꾸려 들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그가 지닌 개의 우주를 수락 했고 그것을 압수하고 싶지 않았으며 그의 은밀한 성향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지도 않았다.

테레자는 그들보다 많이 읽었고 그들보다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몰랐다. 독학자와 학교에 다닌 사람의 다른 점은 지식 폭이 아니라 생명력과 자신에 대한 신뢰감의 정도 차이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유럽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역사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